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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LINE-HEIGHT: 180%; LAYOUT-GRID-MODE: char; MARGIN-BOTTOM: 1.6pt" class=바탕글 align=justify><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여호와께서 이루실 평화</SPAN></P>
<P style="LINE-HEIGHT: 180%; LAYOUT-GRID-MODE: char; MARGIN-BOTTOM: 1.6pt" class=바탕글 align=justify><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SPAN>&nbsp;</P>
<P style="LINE-HEIGHT: 180%; LAYOUT-GRID-MODE: char" class=주해본문 align=justify><FONT face=바탕><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평화의 나라</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를 세우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2절에는 시편의 순례시(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비슷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리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예배하러 여호와의 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펼쳐질 모습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 땅에서 찾을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아니라 사람이 </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는</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윤고딕110" lang=EN-US> 즉, 일상의 </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샬롬</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윤고딕110" lang=EN-US>(안녕)을 회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개인적인 평화와 마음의 안식을 넘어서 미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사회적, 우주적인 평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개인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추구하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모습만이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루는 적극적인 실천의 주체로 성장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평화를 이루는 주체의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라 </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무리</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입니</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다. 즉, 이는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염원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루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내세적인 평화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회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4절에 나타난 평화의 모습은 내세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응당 누려야 할 </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안녕</SPAN><SPAN style="FONT-FAMILY: -가시나무M; FONT-SIZE: 10pt; mso-fareast-font-family: -가시나무M; mso-hansi-font-family: -가시나무M" 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 -윤고딕110; FONT-SIZE: 10pt">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모습입니다. 불의, 전쟁, 죽음,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일상의 안녕을 회복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일상의 평화는 사람들의 기본적 인권, 생존권 등의 기본적 권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평화와 인권의 증진에 나설 사회참여적 의무가 있습니다. 천안새로운교회 가족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가 최종적인 재앙이 아니라 훈계이자 가르침이고 복을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징계와 벌은 회복과 소망을 위한 과정이지 영원한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미워하셔서 관계를 단절하시려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악에서 떠나게 하시고자 채찍을 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처음 모습으로 우리를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회복의 은혜가 있길 축원합니다. </SPAN></FONT></P>